종의 기원

찰스 다윈 지음
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종의 기원"은 좋은 번역본이 나오기를 고대했던 책이다. 드디어 추천할 만한 번역본이 나왔다. 이제 언어의 장벽 없이 다윈의 생각을 만날 수 있다 (번역 별 4.5 ★★★★☆).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p202) 싹은 성장하면서 새로운 싹을 자라나게 만든다. 또한 만일 이 싹이 강한 생명력을 가지는 경우에는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뻗어 다른 많은 연약한 가지들이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그 나무에서도 세대가 거듭되면서 시들어 떨어진 나뭇가지들은 지표를 뒤덮는 반면, 계속해서 갈라져 나가는 아름다운 나뭇가지들은 그 나무를 뒤덮고 있다.

여기에서 이 문장을 다른 번역본의 사례와 비교해보자.

 

책에서 다윈은 진화론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변화를 수반한 대물림의 법칙", 또는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 이라는 이름을 쓴다. 이 이름이 함의하는 바가 있는데, 다윈의 생각을 단계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1. 모든 생명체는 최대한 많이 자손을 낳는다.
1-2.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극심한 생존경쟁 아래 놓인다.
1-3. 자연은 조금이라도 더 생존에 적합한 생명체를 선택한다 (즉 조금이라도 더 적합한 생명체가 번성한다).

2-1.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닮은 자손을 낳는다.
2-2. 하지만 자손은 부모를 닮을 뿐 똑같지는 않다. 즉 변이가 있다.
2-3. 만약 이 변이가 조금이라도 더 생존에 유리한 것이라면 자연은 이 변이를 선택한다 (즉 변이를 가진 생명체가 번성한다).

3. 그래서 기존 생명체와 다른 새로운 종이 만들어진다.

 

다윈은 이 생각을 "느리고 점진적인 변화" 라고 요약한다.

(p431) 종은 대물림과 자연선택을 통해 느리고 점진적인 변화를 겪는다.

 

다윈은 자연선택을 통해 점진적인 변이가 쌓여 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p186~187) 생명의 나무" 그림으로 설명한다. 이 그림은 책의 여러 곳에서 자주 인용된다. 그만큼 다윈이 고민을 응축해 만든 그림이다.

 

다윈은 시종일관 주의 깊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다윈이 설명하는 내용도 뛰어나지만 내용을 떠나 태도를 배우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좋은 책을 내준 역자와 출판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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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알고리즘

 

페드로 도밍고스 지음
강형진, 최승진 옮김
비즈니스북스 펴냄

 

 

수식 한줄 없이 머신러닝을 설명하는 책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서라서 설명이 쉽다. 그런데 설명이 난잡하지 않고 깊이가 있다. 책 말미에서 머신러닝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전망하는데, 저자의 번득이는 통찰을 느낄 수 있었다. 멋진 책이다. 번역도 멋졌다 (번역 별 4.0 ★★★★).

 

머신러닝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질문의 대답이다. 즉 우리는 어떻게 배우는가? 더 나은 방법이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예측할 수 있는가? 우리가 배운 것은 신뢰할 만한가?
당신이 성취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막 상호작용을 한 시스템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이 21세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첫 단계다. 머신러닝을 가르쳐라. 그러면 머신러닝이 당신에게 봉사할 것이다.
연구란 돌고 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 번 돌 때마다 진보를 향하여 나아가는 나선형에 더 가깝다. 머신러닝에서 그 나선형은 마스터 알고리즘으로 수렴한다.
전환기에는 떠들썩하겠지만 다행히 민주주의 덕분에 행복한 결말이 될 것이다 (투표를 소중히 여겨라. 당신의 가장 귀중한 보물일 것이다). ... 결국 우리는 실업률 대신 고용률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고용률의 감소를 발전의 지표로 여길 것이다. 실업급여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기초 수입으로 대체될 것이다.
머신러닝을 통해 우리가 얻는 가장 큰 혜택은 머신러닝이 배운 지식이 아니라 머신러닝을 가르치며 우리가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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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기독교

윤정란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미국은 기독교 국가다.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건너간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비정상이라 느껴질 정도로 크다. 기독교가 종교의 영역을 넘어 과학의 영역까지 간섭한다. 창조론을 보라. 사실 여기에 '론'을 붙이는 것 자체가 과학에 대한 모독이다.

한국은 미국과 무척 닮은 나라다. 6.25를 거치면서 한국은 미국을 닮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일상의 모든 모습이 한국과 너무 똑같아서 놀란 적이 있다. 심지어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력까지 닮았다. 한국도 기독교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크다. 이 책은 그렇게 된 역사를 설명한다.

한국 기독교는 반공을 기치로 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다. 반공을 기치로 정권을 공고히 하려 했던 이승만 ·박정희와 적극적으로 결탁했다. 이승만의 칼이 되어 제주 4.3사건 당시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것도 한국 기독교(서북청년단)였고, 박정희의 변호인이 되어 쿠테타를 인정하도록 미국 교회를 통해 미국 정치계를 설득한 것도 한국 기독교였다.

우리 역사는 지나칠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책 읽는 동안 마음이 편하질 못했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통해 미국 역사가 보였다. 우리 역사만 파란만장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대전과 냉전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 자체가 파란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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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현암사 펴냄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잡지에 연재했던 소설이다. 1905년 서구열강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벌이며 자신감이 붙어가던 일본의 사회상을 옅볼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그 전시장에 도후 군이 들어가 구경하고 있는데, 독일 사람 부부가 들어왔다네. 그들이 처음에는 일본말로 도후 군에게 뭘 물어본 모양이야. 그런데 도후 군은 늘 그렇듯이 독일어를 써보고 싶어 환장한 사람 아닌가. ...
하지만 자넨 대학교수도 뭐도 아니지 않은가? 고작 영어 강독 선생이면서 그런 대가들을 예로 드는 건 잡어가 자신을 고래에 비유하는 것이나 다름없네.
아무래도 아름다운 느낌이 드는 것은 대개 그리스에서 발원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미학자와 그리스는 도저히 떨어질 수가 없네.
나는 주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무슨 업보로 이런 묘한 얼굴을 가지고 염치도 없이 20세기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일까.

무난한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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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

 

저자는 화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이자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유대인이다. 책은 저자가 수행했던 화학 실험과 거기 얽힌 저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제목만큼 구성도 특이한 책이다.

길을 잘못 들어서는 사치도 스스로 허락하지 못한다면 스무 살일 자격이 없다.
매우 용기 있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그 며칠 동안 나는 모든 일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경험들을 하고 싶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바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조금밖에 그리고 그것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것 같은 지금까지의 내 삶을 저주했다.
실수를 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엄격해진다.

번역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번역 별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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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별점에 관해

독후감 2020. 1. 27. 23:36

독후감을 올리는 책들 중 번역서에 대해서 감히 번역 별점을 매기고 있다. 내가 올리는 독후감의 유일한 정보값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객관적이고자 노력하는 번역 별점조차 사실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책을 읽은 후의 감상에 따라 번역 별점이 영향 받는 것을 스스로도 느낀다. 그냥 '이렇게 느낀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만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별점 의미
5.0 ★★★★★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최고의 번역 별점. 이 점수를 주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4.5 ★★★★☆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최고의 번역.
4.0 ★★★★ 역자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질만큼 좋은 번역.
3.5 ★★★☆ 독서가 힘들지 않은 준수한 번역.
3.0 ★★★ 독서가 약간 힘들지만 이해에 무리가 없는 보통의 번역.
2.5 ★★☆ 나쁜 번역. 이보다 낮은 점수의 번역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장 낮은 번역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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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흐름출판 펴냄

좋은 이웃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은 언제나 슬프다.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당신 아직도 모르겠어?" 루시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 상태가 최고라는 건, 더 나아질 게 없다는 뜻이잖아."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에필로그)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괜찮은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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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The Problem with Work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동녘 펴냄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는 유쾌한 유머일 거라고 짐작했다.
제목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을 맡으면 프로답게 하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부조리한 제목으로 시작해서 '열심히 하자'는 격려로 끝나는 달달한 스토리를 상상했다. 그런데 틀렸다. 생각보다 진지하고 무거운 책이었다.


우리는 일이 인생의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한다. 삶의 필수 요소라거나 신이 부여한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 받았다. 하지만 당연함에 묶여 있으면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없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인지 삶인지 용기있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감히 노동철폐나 기본소득 같은 담론을 욕망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그 시대의 담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 담론은 현실이 된다. 상상하면 이룰 수 있다. 문제는 상상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용기의 있고 없음이다.


인공지능과의 경쟁 때문에 일자리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만연한 지금이, 노동은 기계에게 맡기고 사람은 삶을 누리는 유토피아를 적극적으로 상상해야 할 때다.


번역은 매끄럽지 못했다. 하지만, 거친 번역을 감수하고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번역 별 3 ★★★).

 

고된 노동이 정말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면, 부자들은 그걸 모두 독차지했을 것이다. -- 노동조합 운동가
노동자가 물리적 노력뿐 아니라 감정적 기술, 정서적 역량, 소통 능력까지 제공하기를 요구하는 일자리가 많아질 때, 다시 말해 자아의 더 많은 부분이 노동과정으로 끌려들어 가고 관리되어야 할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는 분명히 점점 더 심각해진다.
풀타임의 평생에 걸친 안정적 일자리 모델을 사회 규범으로 여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일에 기초한 혜택을 얻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질 때, (기본소득 요구는) 훨씬 합리적인 방법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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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좋았던 책

독후감 2019. 12. 31. 17:59

2019년에는 19권의 책을 읽었다.
반년 동안 "실천이성비판"을 읽느라 분야별로 골고루 읽지 못했다. 특히 문학 분야의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실천이성비판"은 정말 멋졌다. 삶을 숙고하는 기회가 됐다.

철학 분야
실천이성비판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한 것 같다.


수학 분야
오일러가 사랑한 수 e

읽을 때마다 좋다.


과학 분야
신의 입자

입자물리학 강의를 듣고 유머를 배웠다.


실용 분야
부동산 공화국 경제사

땅이 아니라 땀이 존중받는 대한민국을 꿈꾼다.


문학 분야
책이 좀 많습니다.

도대체 왜 독서하는가?


역사 분야
열하일기

술 좋아하는 멋진 선비의 청나라 여행기. 유쾌하다.


심리/인지과학 분야
당신이 옳다

진심을 다해서 공감하자. 그게 사는 거다.

 

모두 좋은 책이었지만 굳이 한권을 뽑자면 "신의 입자"다. 몰랐던 분야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컸다. 2020년엔 문학책을 좀 더 읽을 계획이다. 시를 꾸준히 외워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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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공화국 경제사

 

전강수 지음
여문책 펴냄

 

해방이후 우리나라 경제사다. 특히 부동산 정책에 집중한다.
"땅이 아니라 땀으로 부자가 되는 자본주의"를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이 무척 건전했다.
재밌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같은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부동산 정책과 미처 몰랐던 그 정책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모든 문장이 흥미진진했다.

 

자본주의에도 나름의 윤리가 있음을 알게 됐다. 근면한 노력과 검소한 절약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건전한 자본주의 윤리다. 부동산을 점유해서 불로소득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땅이 아니라 땀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옳다.

 

노력소득의 차이 때문에 빈부격차가 생길 때는 사회가 그것을 용인한다. ... 반면 불로소득이 빈부격차의 주된 원인이 되는 경우에는 많은 사람이 거기에 불만을 품는다. ... 거기서 부자는 헛된 부러움이나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다.

 

토지공개념은 불로소득 차단,환수 효과를 발휘해 노력하는 만큼 대가가 주어지는 사회를 실현한다. 이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자본주의다.

 

재산세와 종합토지세 모두 조세 부담이 너무 가벼워 부동산에서 생기는 불로소득을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결함을 안고 있었다. 보유세 강화와 시가 상응 과세 실현은 우리나라 부동산 조세 정책의 중대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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