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만남은 재난과 같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일단 맞닥뜨리게 되면 최선을 다해 피해야 한다. 소설은 주인공 '소노카'를 재난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분투하는 주변 어른들의 이야기다. 특히 '소노카'의 여린 본성을 헤아려 배려해 주는 '마쓰나가 나에' 여사가 인상적이었다.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모습을 닮고 싶었다.
EBS에서 진행한 방송 강의를 책으로 옮겼다. 그래서 구어체 문장이 친근했다. 장점이다. 하지만 다양한 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의여서 그런지 설명이 엄밀하지 못했다. 단점이다. '영원회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두리뭉실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제가 20대에 던졌던 문제를 똑같이 고민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원하지만 사실 세상은 끊임없이 돌고 돌 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입니다. (2강 신의 죽음, 허무주의를 끌어안다. 책 26% 위치)
이렇게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체할 수 없는 사치심, 견디기 어려운 지적 허영심 같은 것이 있나요? 한번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세요. 영원회귀를 나타내는 현상이 굉장히 많을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위협적인 사상입니까. (5강 영원회귀, 삶을 긍정하라. 책 59% 위치)
니체는 어떤 증거와 논리를 기반으로 영원회귀를 주장한 게 아니다. 영원회귀는 니체가 독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지금의 삶이 또 반복되어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지금의 삶이 그 기쁨뿐 아니라 슬픔까지 반복되어도 그것을 긍정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삶은 허무하도록 무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를 외치는 용기를 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책이 예로 든 "비슷한 것의 반복"은 니체의 영원회귀가 아니다. 책의 두리뭉실한 설명이 니체의 날카로운 질문을 무디게 만들었다. 책의 설명에 실망했다.
좋은 책인데 구하기 어려웠다. 종이책은 절판되었고, 전자책도 교보 eBook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자책 편집이 독서를 방해할 만큼 엉성했다. 제목이 중간에 잘리는 경우도 있었고, 몇 페이지에 걸쳐 본문 없이 주석만 있는 경우도 있었다. 도처에 띄어쓰기가 무너진 곳이 있었다. 책 20% 분량을 차지하는 2부는 실망스러웠다. 맥락이 다른 이야기를 억지로 덧붙인 느낌이었다. 아쉬움을 표하는 이유는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다듬어서 읽기 좋게 재출간되면 좋겠다.
제목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해석의 다양성과 행위의 다양성을 뜻하는 것 같다. 생명의 무궁한 시행착오가 떠올랐다. 니체는 "차이"를 강조했다. 차이에 대한 인정이, 차이를 불편해하지 않는 태도가 삶을 긍정하는 바탕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긍정의 철학자이자 격려의 철학자였다. 삶을 사는 우리를 목청껏 응원한다. 남들과 다른 나의 해석을 주장하라고 격려한다. 삶을 긍정하라고, 살아남으라고 격려한다.
귀족들은 자신을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 달리 노예는 타자에 대한 부정과 비난에서 시작하고 있다. (책 21% 위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권력의지다. (책 53% 위치)
읽고 보니 니체 철학은 분석할 대상이 아니라 공감할 대상이었다. 그로부터 논리적인 설명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그의 선명한 선언에서 청량함을 느껴야 하는 거였다.
"영원회귀"에 대해 깊게 느낀 바가 있었다. 영원회귀는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삶이 그 슬픔까지 반복되어도, 그 삶 너머에 다른 피안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되어도, 지금 여기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한 번 더!"라고 외칠 수 있는가? 그 영원한 회귀를 놀이로 받아들이는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서 자기만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가?
순간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다. 순간이라는 입구에서 하나의 기나긴 길은 뒤로 달리고, 다른 길은 앞으로 달린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순간이라는 출입구 안에서 공존한다. (책 60% 위치)
작가는 다정다감하고, 말 잘하고, 그러면서도 여린 사람인 것 같다. 단편집 곳곳에서 그런 느낌이 배어난다. 하지만 그의 자전적 소설 "도쿄 팔경"을 읽고 질려 버렸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현실에서 그를 만났다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피했을 것이다.
때로는 작가의 됨됨이와 문학적 성취가 별개인 경우가 있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렇다. 그의 됨됨이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은 재밌다. 이번 독서 덕분에 "데카당(퇴폐적 탐미주의자)"이라는 말을 알게 됐다. 그는 데카당이었다.
이 나이(스물넷)가 돼선, 어디가 틀렸다고 들어도, 저는 이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여치' 편)
기억해 두는 게 좋아. 넌, 이미 청춘을 잃었어. 제법 점잔 빼는 얼굴을 한 삼십 줄 남자다. ('도쿄 팔경' 편)
남들이 좋다고 하는 책은 다 읽어 보고 싶은 욕심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몇 번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차라투스트라..."엔 선언만 있고 설명이 없었다. 이토록 불친절한 철학자를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 걸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를 이해하기에 좋은 텍스트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니체 해설서를 보기로 했다.
숨 가쁘게 읽었다. 흡인력이 엄청났다. 책은 니체가 하고 싶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주 쉽게 설명한다. "신은 죽었다"는 말에서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설명해 준다. 세상은 무의미하다. "신"은 죽었다. 이제 남은 건 의미 없는 세상을 부정할지 긍정할지에 대한 나의 선택뿐이다. 책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인용한다.
(노인은)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혼자서 그것도 사흘 밤낮을 청새치와 사투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