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지브리 음악감독과
뇌과학자의 이토록 감각적인 대화

 

히사이시 조, 요로 다케시 지음
이정미 옮김
현익출판 펴냄

 

지브리 만화영화를 통해 훌륭한 음악을 알려온 히사이시 조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분량이 적다. 음악가 히사이시 조와 뇌과학자 요로 다케시의 대담집인데, 히사이시 조가 인터뷰어 역할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기보다 요로 다케시의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책 어디에도 '음악을 듣는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음악을 주제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나이 든 아저씨들의 술자리 잡담 같다. 다만 대화의 분위기는 따스했다. 번역 좋았다 (번역 별 3.5 ★★★☆).

 

완전히 노망난 척하지만 사실 모든 걸 알고 있는... 그런 어르신은 멋있지요.
(책 89% 위치. 제6장 모든 인간은 예술가다/ 유쾌한 노인들)

 

 

Posted by ingee
,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한스미디어 펴냄

 

브렌델은 1931년생으로 2008년에 은퇴를 선언한 피아니스트다. '작가'는 피아니스트 브렌델이 느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다. 이 책은 '작가' 브렌델이 2012년에 썼다. 알파벳으로 챕터를 나누고 각각의 챕터를 그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단어에 관한 단상으로 채웠다.

 

피아노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의 정신세계를 조감할 수 있었다.

p162. S/ Stille, 영 silence
... 영어에는 listen = silent라는 흥미로운 글자놀이가 있습니다. 청취와 고요는 동일하다는 의미지요.

 

매일 아침 브렌델의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와 함께 조금씩 읽었다. 향긋하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번역 좋았다 (번역 별 3.5 ★★★☆).

 

 

Posted by ingee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곰출판 펴냄

 

자연과학으로 분류된 책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처럼 재밌다. 반전 있는 스토리와 첫 질문을 고수하는 작가의 집요함 덕분이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어떻게 하면 무의미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끈질기게 탐구한다. 작가는 성공한 과학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다. 데이비드는 물고기 종을 연구하는 분류학자였다. 그는 가족의 죽음, 동료의 죽음, 지진, 연구실 화재 같은 커다란 재난을 겪으면서도 매번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연구를 계속했다.

(책 33% 위치, '6. 박살')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우연히 기쁘도록 좋은 책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땐 자연스레 그 책의 저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다 이후 접하는 그 저자의 언행에 실망할 때가 있다. 잠시나마 사랑했던 저자였기에 그럴 때 느끼는 실망감은 더욱 크다. 이 책의 작가 룰루 밀러가 그랬다. 그녀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조사하다 알게 된 사실 때문에 크게 실망한다. 하지만 그 실망 속에서도 자기 질문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찾는다. 마치 데이비드가 자신의 연구성과를 모두 태워버린 화재를 겪고도 다시 연구를 시작했던 것처럼. 강인하게.

(책 60% 위치, '11. 사다리')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저자는 서로를 지켜주는 평범한 사람들의 관계 속에 답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세상은 여린 꽃들의 장엄한 네트워크다. 그런 네트워크를 찾는 것이, 그리고 거기에 힘을 보태는 것이 인생의 의미다. 이제 화엄경을 읽어야겠다.

(책 67% 위치, '12. 민들레')
나는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조용히 나일론 실에 구슬을 하나하나 꿰며, 친구를 위한 깜짝 선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메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메리가 수용소에서 자신을 보호해준 애나에게 영원히 은혜를 갚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답하는 그 행위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을.
(책 68% 위치, '12. 민들레')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아주 좋은 번역이었다 (번역 별4 ★★★★).

 

 

Posted by ingee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펴냄

 

아버지의 늘그막 친구 박선생. 그는 6.25 전쟁 때 빨치산 토벌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형은 빨치산이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하염없이 사는' 사람이다.

(책 18% 위치)
어느 날 박선생이 느닷없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나는 매일 밤 남은 의지를 쥐어짜 양치질을 한다. 그러는 이유는 대단치 않은 내일을 맞기 위해서다. 언제까지라고 기약할 수 없다. 다만 반복할 뿐이다. 소소한 의지를 갖고 반복한다. 누구나 그렇게 소소한 일상을 의욕하고 반복한다. 일상을 반복하는 것과 체념하는 것은 다르다. 행여나 박선생의 하염없는 삶이 하염없이 체념하는 삶은 아니었기를 바랬다.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던 주인공은 가난한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 말로 다 하기 힘든 고단한 인생을 산다. 책에는 그런 고단함이 그닥 나오지 않지만 같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무리 지으며 주인공은 원망 없이 아버지를 애도한다.

(책 마지막 문장)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좋았던 글귀를 덧붙여 본다.

(책 51% 위치)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책 마지막 '작가의 말')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Posted by ingee
,

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전현희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본 사람은 무척 드물다. 이 책이 출간된 1983년을 기준으로 100명 남짓 밖에 안 된다. 거기서 우주선 밖으로, 그러니까 진짜 우주로 나가 본 사람은 더 드물다. 우주유영이나 달착륙 임무를 수행한 우주비행사만이 그런 경험을 했다.

적막한 우주 속을 홀로 유영할 때, 또는 달에 착륙해서 광활한 우주와 그 속에 떠 있는 조그만 지구를 올려다볼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이 책은 그런 체험을 가진 우주비행사들을 찾아가 인터뷰한 기록이다.

한마디로 압도적인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런 체험을 하는 순간에는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툼이 덧없게 느껴진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지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지구 밖에서 보면 인간 개개인의 차이점은 보이지도 않고 인류로서의 공통점만 드러나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책이 전하는 우주여행 후의 뒷얘기를 들어 보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체험을 하고도 모두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인격적 성취는 개인에게 달린 문제인 것 같다. 흔치않은 경험을 접할 수 있는 독서였다. 번역도 나쁘지 않았다 (번역 별 3.5 ★★★☆).

 

의무감을 강하게 느꼈다...
이 체험의 가치는 나의 개인적 가치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돌아와서 인류에게 전해야 할 가치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종의 센서이다. 감각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 인생 가운데 가장 고조된 순간이었지만, 에고가 고조되는 순간이 아니라 에고가 소실되는 고조의 순간이었다. 종이라는 것을 이만큼 강력하게 의식했던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종을 앞에 둔 개인의 하찮음을 강하게 느꼈다.

 

 

Posted by ingee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문학동네 펴냄

 

가슴 아린 이별 이야기 10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조금씩 다른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게 그린다. 번역 좋았다. 작가의 미묘한 표현을 잘 잡아 전달한다 (번역 별4 ★★★★).

지금보다 어렸을 적 나는 시가 좋은 것을 몰랐다. 지금은 시를 좋아한다. 비슷하게 지금의 나는 이런 사랑 이야기가 좋은 것을 모르겠다.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같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지 모르겠다.

 

"헤더는 풀이를 제출한 유일한 학생이었어요." 그가 말했다. "그것이 시험이었어요. 헤더는 통과했고."
"그럼 이제 저는 A를 받게 되나요?"
"아뇨. 차를 좀 얻어 마시게 되지요."

 

Posted by ingee
,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심너울 지음
아작 펴냄

 

제목을 보고 나이듬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인 줄 알았다. 읽고 보니 통통 튀는 표현의 SF 코미디 모음집이었다. 설정이나 묘사가 치밀하진 않지만 재밌는 아이디어를 정말 재밌게 풀어낸다. 단편 하나하나마다 웃음 포인트 하나는 꼭 있다. "작가의 말"도 작품 본편만큼이나 재밌다.

 

여전히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기묘한 발견의 기쁨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지도교수 S씨와 마주치자마자, 퇴근하고 싶다는 감정을 통해 정보를 과거로 전송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퇴근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 즉 정보가 과거로 흐른다는 것, 바로 초광속 통신의 기본 골자인 ‘Salyojo 프로토콜’ 의 기본 원리가 발견된 순간이었다.

 

 

Posted by ingee
,

Exhalation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엘리 펴냄

 

테드 창의 글은 전작처럼 여전히 치밀했다. 단순한 상상을 견고한 설정으로 발전시켜서 있을 법한 사건을 전개한다. 그리고 예측 못한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작가의 주된 고민은 필연과 자유의지였다. 인생이 필연의 연속이라면 그래도 우리는 그 인생을 살아야 할까? 인생이 필연의 연속이어도 거기에 자유의지가 끼어들 틈이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창조할 수 있을까?

재밌는 이야기였고, 좋은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우리는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Posted by ingee
,

배움의 발견

Educated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열린책들 펴냄

 

메시지가 분명한 잘 짜여진 이야기다. 그래서 믿을 수 없었지만, 실화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던 저자가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자기 인생을 결정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시종일관 사람들 저마다의 기억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기억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가 교육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을 기초로 저자는 주변 사람들의 기억을 모아 자기의 과거를 재구축하고,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선택한다. 그렇게 저자가 어린 아이에서 성숙한 인격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저자의 결론에 따르면 그것은 변신이었다. 그리고 그 변신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녀가 발견해낸 교육 덕분이었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아주 좋은 책을 읽었다. 좋은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Posted by ingee
,

수학자들

세계적 수학자 54인이 쓴 수학 에세이

 

마이클 아티야, 알랭 콘, 세드릭 빌라니, 김민형 外 지음
장 프랑수아 다르스, 아닉 렌, 안느 파피요 엮음
권지현 옮김
궁리 펴냄

 

2008년, 프랑스의 고등과학연구소에 모여 있던 세계적인 수학자들의 사진과 그들의 짤막한 에세이를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책을 읽고, 수학자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가 칠판임을 알게 됐다. 무난한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0123456

Posted by ing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