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요시미 슌야 지음
서의동 옮김
AK 펴냄

 

세상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불구경은 그렇게 재밌지 않았다.

 

헤이세이平成는 1989년부터 2019년까지 30년간 일본이 쓰던 연호다 (지금은 레이와令和를 쓴다). 이 시기 일본은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경제가 망했고, 정치가 망했고, 사회가 망했다. 그런데 일본이 겪은 실패의 목록이 낯설지 않다.

헤이세이 30년간... 위기는 심화했다... 비정규고용 확대와 고용불안, 고학력층의 취직난, 워킹푸어 등의 문제가 분출했고... 초고령화 사회의 도래... 저출산... 세대 간 이해대립이 격화됐다.

비정규직, 고용불안, 청년취업, 워킹푸어, 저출산, 세대갈등... 바로 우리 문제다. 1989년 일본에는 "1.57 쇼크"라는 말이 회자됐다. 출산율이 1.57까지 떨어져 미래에 일본이 지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쇼크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0에도 못 미친다. 어쩌면 우리는 일본보다 더 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의 일본은 한때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앞질렀던 압도적인 경제 대국이었다. 그랬던 일본이 30년째 제자리인 이유는 1980년대의 압도적인 성공에 취해 위기를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날아오는 펀치를 피할 수 없다. 맞더라도 두 눈 뜨고 맞아야 한다. 성공하고 있을 때, 자신감이 넘칠 때 조심해야 한다.

세계사가 대전환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에서 플라자 합의에 이르는 과정... 일본은 1970년, 80년대를 '풍족한 소비사회' 시대로 구가했기 때문에 동시대에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에 둔감했다.
결국, 헤이세이 일본 사회가 향한 것은 비정규고용의 청년과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사회 전체가 착취하는 체제의 고착화였다. 이를 정당화한 것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고, 여기에 동원된 것이 '구조개혁'이라는 캐치플레이즈였다.

 

일본의 지난 30년은 우리가 참고할 아주 좋은 선례다. 우리가 눈앞에 닥친 위기를 일본보다는 덜 아프게 헤쳐나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쁘지 않은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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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저자 유홍준 선생님이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인생을 들려준다. 어눌한 듯 할 말 다하는 저자 특유의 구수한 문장이 좋았다. 저자는 오랫동안 추사를 연구해 왔고 이미 한차례 추사 연구서도 저술한 바 있는 추사 전문가다.

추사의 작품이 많이 실려 있다. 글과 그림을 보는 안목이 없고 한자 까막눈인 내가 봐도 뭔가 멋졌다. 작품마다 어떤 점을 눈여겨 봐야 하는지 설명이 달려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편집도 좋고 종이도 좋아서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저자의 안내로 추사를 따라 태어나서 살고 죽은 느낌이다. 추사는 명문가에서 부족함 없이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노년에 2차례 긴 귀양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었다. 그의 빛나는 작품은 그런 고단한 노년에 무르익었다. 누구나 삶을 살지만, 그 속에서 인격을 완성시켜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예술이다. 추사는 글,그림의 예술가가 아니라 삶의 예술가였다. 존경스럽다.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칠십 평생에 나는 벼루 열 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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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시간

 

조국 지음
한길사 펴냄

 

다 알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지식은 신문기사 제목을 대강 훑어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00여 건의 압수수색과 100만여 건의 언론 보도를 당사자의 증언을 통해 체험할 수 있었다. 참혹했다.

검찰이 얼마나 불의한지 언론이 얼마나 비열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검찰과 언론이 한패였다. 검찰과 언론이 온 힘을 다해 한 가족을 죽이려 했다. 검찰이 언론에 수사 정황을 흘리는 것은 불법이지만, 검찰 조직에 내면화된 수사 기법이기도 하다. 수사정보 유출을 이유로 처벌 받은 검사는 지금껏 없었다.

핵심은 검찰 개혁이다. 조국 장관이 장관직을 수락한 것도, 장관직을 사임한 것도, 또 검찰이 유래 없이 한 가족을 집요하게 핍박한 것도 (검찰의 핍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감히 검찰을 개혁하려 했기 때문이다.

예상되는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조국 장관은 때를 살펴 언행의 형식을 골랐을 뿐 언행 자체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때를 살펴 행동한다. 이 책의 제목이 '조국의 시간'인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이유가 있으면 주저 없이 행동하는, 칼날처럼 올곧은 선비다. 살아남아 이 시대를 함께 버텨주는 저자가 고맙다.

 

한국 검찰은 선출된 권력이 아니지만,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선출된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심지어 교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고, 실천해왔다... 이 과정에서 검,언,정 카르텔이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검찰공화국'이 아니라 '공화국의 검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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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전현희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 본 사람은 무척 드물다. 이 책이 출간된 1983년을 기준으로 100명 남짓 밖에 안 된다. 거기서 우주선 밖으로, 그러니까 진짜 우주로 나가 본 사람은 더 드물다. 우주유영이나 달착륙 임무를 수행한 우주비행사만이 그런 경험을 했다.

적막한 우주 속을 홀로 유영할 때, 또는 달에 착륙해서 광활한 우주와 그 속에 떠 있는 조그만 지구를 올려다볼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이 책은 그런 체험을 가진 우주비행사들을 찾아가 인터뷰한 기록이다.

한마디로 압도적인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런 체험을 하는 순간에는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툼이 덧없게 느껴진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지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지구 밖에서 보면 인간 개개인의 차이점은 보이지도 않고 인류로서의 공통점만 드러나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책이 전하는 우주여행 후의 뒷얘기를 들어 보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체험을 하고도 모두가 인격적으로 성숙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인격적 성취는 개인에게 달린 문제인 것 같다. 흔치않은 경험을 접할 수 있는 독서였다. 번역도 나쁘지 않았다 (번역 별 3.5 ★★★☆).

 

의무감을 강하게 느꼈다...
이 체험의 가치는 나의 개인적 가치가 아니라 내가 가지고 돌아와서 인류에게 전해야 할 가치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종의 센서이다. 감각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 인생 가운데 가장 고조된 순간이었지만, 에고가 고조되는 순간이 아니라 에고가 소실되는 고조의 순간이었다. 종이라는 것을 이만큼 강력하게 의식했던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종을 앞에 둔 개인의 하찮음을 강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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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문학동네 펴냄

 

가슴 아린 이별 이야기 10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조금씩 다른 사랑과 이별을 담담하게 그린다. 번역 좋았다. 작가의 미묘한 표현을 잘 잡아 전달한다 (번역 별4 ★★★★).

지금보다 어렸을 적 나는 시가 좋은 것을 몰랐다. 지금은 시를 좋아한다. 비슷하게 지금의 나는 이런 사랑 이야기가 좋은 것을 모르겠다. 내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같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지 모르겠다.

 

"헤더는 풀이를 제출한 유일한 학생이었어요." 그가 말했다. "그것이 시험이었어요. 헤더는 통과했고."
"그럼 이제 저는 A를 받게 되나요?"
"아뇨. 차를 좀 얻어 마시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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