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곰출판 펴냄

 

자연과학으로 분류된 책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처럼 재밌다. 반전 있는 스토리와 첫 질문을 고수하는 작가의 집요함 덕분이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어떻게 하면 무의미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끈질기게 탐구한다. 작가는 성공한 과학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다. 데이비드는 물고기 종을 연구하는 분류학자였다. 그는 가족의 죽음, 동료의 죽음, 지진, 연구실 화재 같은 커다란 재난을 겪으면서도 매번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연구를 계속했다.

(책 33% 위치, '6. 박살')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우연히 기쁘도록 좋은 책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땐 자연스레 그 책의 저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다 이후 접하는 그 저자의 언행에 실망할 때가 있다. 잠시나마 사랑했던 저자였기에 그럴 때 느끼는 실망감은 더욱 크다. 이 책의 작가 룰루 밀러가 그랬다. 그녀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조사하다 알게 된 사실 때문에 크게 실망한다. 하지만 그 실망 속에서도 자기 질문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찾는다. 마치 데이비드가 자신의 연구성과를 모두 태워버린 화재를 겪고도 다시 연구를 시작했던 것처럼. 강인하게.

(책 60% 위치, '11. 사다리')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저자는 서로를 지켜주는 평범한 사람들의 관계 속에 답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세상은 여린 꽃들의 장엄한 네트워크다. 그런 네트워크를 찾는 것이, 그리고 거기에 힘을 보태는 것이 인생의 의미다. 이제 화엄경을 읽어야겠다.

(책 67% 위치, '12. 민들레')
나는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조용히 나일론 실에 구슬을 하나하나 꿰며, 친구를 위한 깜짝 선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메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메리가 수용소에서 자신을 보호해준 애나에게 영원히 은혜를 갚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답하는 그 행위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을.
(책 68% 위치, '12. 민들레')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아주 좋은 번역이었다 (번역 별4 ★★★★).

 

 

Posted by ingee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펴냄

 

아버지의 늘그막 친구 박선생. 그는 6.25 전쟁 때 빨치산 토벌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형은 빨치산이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하염없이 사는' 사람이다.

(책 18% 위치)
어느 날 박선생이 느닷없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나는 매일 밤 남은 의지를 쥐어짜 양치질을 한다. 그러는 이유는 대단치 않은 내일을 맞기 위해서다. 언제까지라고 기약할 수 없다. 다만 반복할 뿐이다. 소소한 의지를 갖고 반복한다. 누구나 그렇게 소소한 일상을 의욕하고 반복한다. 일상을 반복하는 것과 체념하는 것은 다르다. 행여나 박선생의 하염없는 삶이 하염없이 체념하는 삶은 아니었기를 바랬다.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던 주인공은 가난한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 말로 다 하기 힘든 고단한 인생을 산다. 책에는 그런 고단함이 그닥 나오지 않지만 같은 시기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무리 지으며 주인공은 원망 없이 아버지를 애도한다.

(책 마지막 문장)
아버지의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좋았던 글귀를 덧붙여 본다.

(책 51% 위치)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책 마지막 '작가의 말')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Posted by ingee
,

제프벡 형님이 세상을 뜨셨다. 허전하다.

https://youtu.be/ciEXu13EHiU?si=eJ5QsChkvb3g0gEG

 

Posted by ingee
,

2022년 좋았던 책

독후감 2023. 1. 11. 08:11

2022년에는 24권의 책을 읽었고, 1권을 읽고 있다. 연초에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기 시작했는데 해를 넘기도록 마치지 못했다. 운 좋게 좋은 독서모임을 만나 참석하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이 아니었으면 독서의 폭이 더 좁았을 것이다. 분야별로 좋았던 책을 꼽아 본다.

 

철학 분야 : 판단력 비판

철학 분야에서 1년 동안 읽은 게 (정확히는 읽고 있는 게) 이것뿐이다. 이제 조금 칸트 선생님과 대화가 통한다.

 

수학 분야 : 리만 가설

수학 분야에서도 1년 동안 읽은 게 이것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좋은 책이다. 수학 분야에서 읽은 책의 수가 많았어도 이 책이 베스트였을 것 같다.

 

과학 분야 : 풀하우스

20년 만의 리바이벌 독서였다. 시간이 지났어도 역시나 좋았다.

 

사회/경제 분야 : 가불 선진국

조국 전 장관님의 사심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억해야 할 사람이다.

 

문학 분야 : 쇳밥일지

시원시원 거칠 것 없는 청년의 이야기가 좋았다. 대한민국 청년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역사 분야 : 열하일기,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저자가 박지원 선비님을 좋아한다. 팬레터를 보는 느낌이었다.

 

심리/인지과학 분야 :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일 년 내내 읽고 있는 『판단력 비판』은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다. 의도하고 고른 건 아닌데 이 책도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 년 내내 읽고 있는 책과 연결되며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모두 좋은 책이었지만 굳이 한 권을 꼽자면 『리만 가설』이 가장 좋았다. 수학과 물리학을 하나로 꿰뚫는 공식의 존재를 알게 됐다.

 

 

Posted by ingee
,

만화로 만나는 논어

공자, 안 될 줄 알면서 하는 사람

 

김경일 글,그림
임종수 감수
도서출판문사철 펴냄

 

사실 논어는 아주 평이한 언어로 기록된 친절한 책이다. 하지만 처음 읽자면 불친절하다고 느끼게 된다. 넘어야 할 벽이 있기 때문이다. 논어에는 시공간과 인물에 대한 소개가 없다. 갑작스러운 시공간에서 누군지 모를 인물들이 난데없는 대화를 펼친다. 어떤 시대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인물들이 나눈 대화인지에 대해 약간만 더 소개해 줬어도 이해하기가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려 2,500년 전에 대나무 죽간에 기록한 책이라서 그렇다. 매체의 한계 때문에 글자를 아끼고 아껴서 뼈대만 조각해 전했다.

이 책은 논어의 뼈대에 스토리의 살을 입혔다. 쉽게 읽을 수 있는 만화책이다. 문장에 대한 설명도 좋았고 개성 있는 그림체도 좋았다. 독서를 통해 공자님과 제자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논어 속 문장에 대한 번역도 흠잡을 데 없었다 (번역 별 3.5 ★★★☆).

 

 

Posted by ing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