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다보스에 있는 요양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현실에서 벗어나 요양 중인 환자들의 시간관념은 일반인들과 다르다. 그들에게 1주 내지 3주 정도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라 할 것도 없는 시간이다. 그들은 매일 같은 일과를 반복하며 시간을 인지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거기 머문다.
이야기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대개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인물에 대한 묘사가 깊이 있어서 그들이 죽어 사라질 때마다 마음 아팠다. 특히 주인공의 사촌 요하임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젊은 군인이었던 그는 병사하기보다 전사하기를 바랐으나, 결국 병마와 싸우다 죽는다.
사실, 현실 속의 우리도 매순간 죽음을 직면하고 산다. 잊고 살 뿐이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못되게 굴어선 안 된다. 상냥한 하루를, 더 나아가 상냥한 인생을 다짐해본다.
올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독서하고 있다. 직전 독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얼핏 언급되어 읽게 됐다. 만족한다. 번역은 평범했다 (번역 별 3 ★★★).
(『죽음의 수용소에서』 52% 위치) 이와 관련해서는 예리한 심리학적 관찰이 돋보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서로 비슷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 즉 폐결핵에 걸려 요양소에서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는 환자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영적인 발달단계를 얘기하고 있다. 그들도 똑같은 상태, 미래도 없고 삶의 목표도 없는 생존의 상태를 경험한 것이다.
호흡이 빠른 책이다. 짤막한 챕터가 빠르게 이어진다. 1946년에 출간되어 오래된 책이지만 긴 글 읽기가 힘겨워진 요즘 아주 잘 맞는다.
번역서의 제목이 아쉬웠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아니다. 이 책은 피할 수 없이 강제로 맞은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를 이야기한다. 수용소에서의 경험이 반절이고, 거기서 빚어낸 저자의 조언이 반절이다. 원서의 제목을 살려서 소개했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사람은 의미를 찾는다' 정도면 어땠을까?).
지금 내 상황과 잘 맞았던 것 같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많았다. 독서하면서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좋았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니체가 말했다.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직전 독서 『나라는 착각』에서 언급되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책의 분량에 비해 긴 시간(1달)을 들여 반복해서 읽었다. 저자의 이야기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고통', '죄', '죽음'의 제약을 피할 수 없다.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삶의 의미'다. 삶에서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낸다 (삶이라는 책임을 피하지 않는다). 인간은 '일(행위)', '경험(사랑)', 그리고 '강제로 맞닥뜨린 시련' 속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심지어! 시련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저자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가 곱씹을수록 위로가 됐다.
삶이 힘들 때마다 치료약이 되어줄 책이다.
(책 56% 위치) 우리는...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보다 번역이 좋지 않았다. 책 내용이 주는 감동이 번역에 대한 기억에 영향을 줬던 것 같다. 그만큼 내용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