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에는 16권의 책을 읽었다. 사서 쟁여 놓은 지 10년 만에 칸트의 비평 시리즈 3권을 완독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뿌듯하다. 칸트 독서에 시간을 많이 투자한 탓에 다른 책을 읽지 못했다. 특히 수학 분야의 책을 전혀 읽지 못했다. 새해에는 시집도 읽고 수학도 읽어야겠다. 분야별로 좋았던 책을 꼽아 본다.
저자(지그문트 바우만)는 뚜렷한 국적도 없이 떠도는 떠돌이 철학자다. 그에게는 뿌리내릴 단단한 지반이 없다. 그래서 '유동성(Liquid)'이란 단어가 그를 정의하는 키워드가 됐다. 저자가 보기에 급변하는 사회를 사는 현대인 모두가 단단한 지반을 잃은 유동성의 인간들이다. 60~70년대에는 후진국에서, 80~90년대에는 개도국에서, 2000년대 이후에는 선진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저자의 생각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에는 고정된 것이 없다. 영원하길 바라며 의지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변한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해결한 문제보다 해결할 문제가 더 많다. 노인과 청년, 남성과 여성, 보수와 진보가 갈라져 서로를 혐오하는 사회갈등이 문제고,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저출산이 문제고, 청년들의 일자리 부족이 문제고, 노인들의 빈곤이 문제다. 이 책은 이 문제들이 유럽 선진국들에게도 당면 과제임을 알려준다.
인터뷰어(리카르도 마체오)와 인터뷰이(지그문트 바우만)는 서면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들은 교육에서 문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사실 얽히고설킨 대한민국의 교육 문제를 생각할 때, 교육 제도를 개선해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오가는 질문과 답변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무척 즐거웠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지적인 대화를 펼쳐가는 모습이 경이로왔다. 저자들처럼 대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발췌한다.
유럽에서도 낮은 출산율이 사회 문제다.
(유럽 전역에서 계속 감소하고 있는) 현 출생률로 보아... "이민자는 위험이 아닌 자산" (1. 혼성 애호와 혼성 혐오 사이 p12)
유동성 속의 인간에게는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는 능력과 낡은 것을 빨리 잊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방에 정보가 너무 많다. 정보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99.99퍼센트의 원하지 않는 정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있다." ( 7. 퇴폐는 박탈의 가장 교묘한 전략 p65)
유럽에서도 청년 세대의 빈곤이 사회 문제다.
전후 유럽사의 흐름에서... 먼저 '베이비 붐' 세대가 있었고, 각각 X세대와 Y세대로 불리는 세대가 뒤를 이었습니다. ... 가장 최근에는 Z세대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예고가 있었죠. ... 이 세대는 전후 최초로 사회적 지위가 하강 이동될 것이라는 전망을 맞닥뜨린 세대입니다. ( 8. 오랫동안 쌓아온 것들이 파괴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몇 분 p79)
유럽에서도 청년 세대의 일자리 부족이 사회 문제다.
대학 졸업장을 상자 속에 처박아놓고 배달원, 가게 점원, 택시 운전사, 웨이터 등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직종에 눌러앉는 졸업생들이 점점 더 늘고 있어요. ( 11. 실업자도 복권은 살 수 있지 않나요? p115)
소위 말하는 보통 또는 정상의 의미가 '통계적 다수일 뿐'이라는 지적이 통쾌했다.
통계적 다수에 속한다는 사실 외에 '정상'의 뜻이 또 무엇이 있을까요? 또 통계적 소수에 속한다는 사실 말고 '비정상'의 뜻은요? ( 12. 정치적 문제로서 장애, 비정상, 소수의 문제 p122)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라는 사회 시스템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사회 문제는 없다.
지금 우리는 모두 소비자입니다. 다른 무엇이기보다 먼저 소비자며, 소비자로 존재하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예요. ... 슈퍼마켓은 우리의 사원인 셈이에요. ... 쇼핑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쾌락의 부재뿐 아니라 인간 존엄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 14. 결함 있는 소비자와 끝없는 지뢰밭 p143)
박탈된 사람들이 빈민가나 다름없는 도시 특정 지역에 밀집해 사는 이유는 사회 정책 때문이 아니라 주택 가격 때문입니다. ( 14. 결함 있는 소비자와 끝없는 지뢰밭 p148)
우리가 경력을 쌓느라 배우자와 자녀를 등한시하는 사이 마케팅 전문가들은 보상의 형태로 항상 무언가를 구매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죄책감을 자본화합니다. ( 20. 성숙기에 이른 글로컬라이제이션 p213)
이 책은 인류의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정치 경제 시스템에 대해 고찰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무한 생산과 무한 소비를 추구한다. 유한한 세상에서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다보니 파국을 피할 수 없을텐데,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지켜 보기만 한다. 이 책은 그 이유를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경제서? 아니다. 이 책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의 후예이며 정신분석 학자다. 정치서? 아니다. 이 책은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대한 연구 논문이다. 철학, 신학, 과학을 넘나들며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다. 지극히 사실적인 자료를 근거로, 지극히 논리적인 방법으로, 지극히 과학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었다. 기독교는 예수를 특별한 영웅으로 부각시킨다. 예수를, 사랑을 실천하는, 영웅적 존재로 부각시킨다. 그렇게 예수는 우상이되고, 평범한 개인은 예수로부터 소외된다. 즉, 예수를 닮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대신, 신앙을 소유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 한다. 탐욕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더라도,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소유하면,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현대 기독교는 이런 소외를 방조할뿐아니라 조장한다. 그래야 개인에게서 유리된 예수를 독점해서 사업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카롭지 않은가?
저자는 인간의 소외, 다시 말해 인류의 방관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저자는 인류가 파국을 피하려면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자기 생각을 한다고 착각한다. 혹시나 그 생각이 매스컴을 통해 세뇌된 남의 생각이라고 의심해본 적은 없는가? 저자는 인류가 제정신이라면, 진정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분명히 파국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현실의 부조리를 넋놓고 방관한다면, 인류는 "멸망해도 싼" 존재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범우사에서 출간된 번역서를 몇 년 동안 표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었다. 원서 제목은 "To Have or To Be". 얇고 가격도 싼, 바람직한 책이다. 번역은 무난하다. 초반 번역은 감동스러울 정도로 충실한데, 마지막 장 부근의 번역이 다소 불만스럽다. 그래도 그정도면 훌륭하다. 인생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2023.11.27.
나의 삶은 무엇으로 평가될까? 나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내가 살며 모아 온 소유물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꾸면 사회의 현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1976년에 출간된 책이다. 하지만 오래된 책이라고 독서를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의 내용은 아직도 적절하며 여전히 살아 있다. 읽을 때마다 태도를 바로잡게 만드는 좋은 책이다.
조국 전 장관은 자신의 본분을 공부라고 말한다. 그는 법을 공부하는 학자다. 그가 윤석열 정부의 법치는 법을 이용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 자신의 가장 큰 존재 가치를 공부하는 사람, 학인學人에 둔다. (p005. 길 없는 길)
세상의 모든 문제를 압수·수색과 체포·구속으로 해결하려는 '형벌과잉'의 시대가 열렸다. (p009. 길 없는 길)
나는 디케가 형벌권으로 굴종과 복종을 요구하는 신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갖고 사람을 대하는 신이라고 믿는다. (p013. 길 없는 길)
윤석열 정부는 자신이 내세우는 '법치'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라고 공문서에 명기했다. ...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 '법치'가 '법을 이용한 지배'가 될 때 법은 법의 외피를 쓴 폭력이 된다. (p124. 정의/ 법은 지배계급의 도구?)
이 책은 윤석열 검사독재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국가 요직을 장악한 검사들의 면면을 나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사료적 가치가 있다.
국가안보실의 실세로 '신냉전'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은 검사 출신이 아니지만, 그의 부친은 대검 중수부장·서울중앙지검장을 역임한 김경회 씨다. 윤 대통령이 총애하는 '특수부 라인'의 대선배인 것이다. (p068. 신검부/ 권력 그 자체가 된 시녀)
윤 대통령은 금융감독원장(차관급)에 이복현 전 부장검사(사법연수원 32기)를 임명했다. 그는 '윤석열라인'의 막내... 첫 '검사 출신 금감원장의 임명'은 '관치 금융'을 넘어 '검치 금융'이 전개된다는 신호다. (p070. 신검부/ 권력 그 자체가 된 시녀)
이제 검사독재를 끝장내는 것이 우리 민주시민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우리는 군사독재와 IMF 경제 환난을 버텨내고 끝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이번 과제도 충분히 감당해낼 것이다.
현재 정치권력의 핵심은 검사 카르텔에, 경제권력의 핵심은 재벌 카르텔에 있다. 이 두 카르텔은 선출된 권력이 아니지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운영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검찰과 재벌이라는 두 카르텔에 의한 과두제를 해결하는 것이 21세기 민주공화국 주권자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p027. 검찰권/ 법이 총칼이 되는 시대가 열리다)
국민의 정치참여만이 '대한검국'을 '대한민국'으로 되돌릴 수 있다. (p095. 퇴행/ 이명박근혜 정권의 난폭한 부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그리 쉬울 리 없지 않은가. (p135. 정의/ 법은 지배계급의 도구?)
조국 전 장관은 책 곳곳에서 윤석열 정부의 집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윤석열 집권의 빌미가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나는 오히려 우리 사회가 그와 그의 가족분들께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조국 전 장관 가정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