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콘다

 

존 브룩스 지음
이동진 옮김
그린비 펴냄

 

2009. 3.3.

지금 미국의 경제 상황은 상당히 파국적인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골콘다는 1930년대 대공황기의 월스트리트를 다루는 책이다. 경제서나 역사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딱딱하지 않고 소설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다. 전설적인 은행가 JP 모건, 뉴딜 정책의 루스벨트 대통령,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조세프 케네디 등 매혹적인 인물들이 이야기의 주변을 장식한다.

이 책을 읽고 당분간 그러니까 한 3~4년간 주식시장에 대한 관심을 끊기로 했다. 대공황기에도 주식 시장은 오르락내리락 했다. 문제는 오르는 구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짧은 오르막에 주식을 산 사람들은 처참할 정도로 깊은 내리막을 경험해야 했다.

이 책은 탐욕과 탐욕을 조장하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 에리히 프롬은 탐욕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본성이라고 했다. 지금이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이 서로 나누며 상대를 배려하는 사회 시스템을 모색해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펴낸 '그린비'는 믿을만한 출판사다. 번역도 훌륭했다.

 

2021. 11.21.

1929년 10월 미국 주식 시장이 붕괴했다. 그 여파로 미국은 1930년대 내내 대공황을 겪었다. 이 책은 그 시기 월스트리트 이야기다. 이 책을 통해 1907년에도 대공황이 있었다는 것, JP 모건이라는 은행가가 1907년 대공황 수습에 기여하며 영웅으로 등장했다는 것,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이 많은 시행착오와 큰 저항을 겪으며 실행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옛날에 쓴 독후감을 통해 과거의 나를 만났다. 10년 전 나는 고작 책 한 권 읽고 무언가 예측하려 했다. 지금의 말과 행동이 미래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한다. 번역 좋았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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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달러』

독후감 2021. 11. 14. 21:27

달러

the DOLLAR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

 

엘런 H. 브라운 지음
이재황 옮김
AK 출판사

 

2009. 8.17.

현재의 경제상황과 맞물려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책을 읽으며 했던 생각들을 정리한다.

화폐의 의미

화폐는 재화의 교환을 위해 만들어낸, 가치에 대한 상징이다. 그 가치가 금 같은 귀금속일 필요는 없다. 본질적으로 따졌을 때, 화폐가 상징하는 가치는 땅속에 매장된 귀금속의 가치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내는 재화(물품과 서비스)의 가치다. 중세 영국에서는 국가에 대한 부역 의무를 나무에 새겨 화폐처럼 사용했다. 이를 '부절'이라고 불렀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오해

'부절'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이용해 만든 화폐다. 그래서 국가는 '부절'을 필요한 만큼 만들어 시장에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절' 시스템을 사용했던 중세 영국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없었다. 유통되는 '부절'이 늘어나면 유통되는 '가치 (물건과 서비스)'도 함께 늘어났기 때문이다. 흔히 화폐의 공급을 늘리면 인플레이션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통화량 조절 업무를 은행권 전문가가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미국은 통화량 조절 업무를 연방준비위원회에게 맡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엄청난 디플레이션이 반복됐다. 왜일까?

현 금융위기의 본질

문제는 연방준비위원회가 명칭이 주는 느낌과는 다르게 철저한 민간조직이라는 점에 있다. 연준위는 연준위의 지분을 장악하고 있는 은행가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은행가들은 우여곡절 끝에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독점했고, 이를 이용해서 금융자본을 탐욕스럽게 확장시켜 왔다. 현 금융위기의 본질은 금융자본의 과도한 대출과 그로인한 거품이다. 다시 말해 무리한 담보대출이 부실해지면서 은행이 망하게된 상황이다. 이제 그들은 국민의 세금과 통화발행을 통해 도산을 피하려 할 것이다.

한국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

이것은 미국 얘기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세계의 변방, 한국에 사는 힘없는 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소견이 좁아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무탈하게 위기를 넘기고 경제 상황이 풀리기를 희망할 뿐이다. 다만 가능하다면 당분간은 은행 대출을 자제해야 겠다고 생각한다. 미국달러의 가치와 미국은행의 생존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향후 국내 금리의 향방을 예측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2021. 11.14.

십 년 전 마지막 문단에 덧붙였던 초라한 전망에서 그나마 건질 것이 있다면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고백뿐인 것 같다.

당시 나는 돈(채무 기반 화폐)에 붙는 이자 때문에 모든 경제 활동의 성과가 결국엔 은행가의 차지가 되고 만다는 책의 설명에 마음이 불편했었다. '채무 기반 화폐'에 대한 당시의 불편함은 지금도 유효하다. 대안화폐가 필요하다는 책의 지적에 공감한다.

제퍼슨은 몇 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나쁜 것은 지폐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지폐로 가장한 민간의 빚이었다. 그저 '돈을 가진 체하는' 은행가들에게 진 빚이었다.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 2000년 닷컴 버블 붕괴,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위기를 직접 겪었다. 돈에 대해서, 경제 구조에 대해서 고민할 이유가 충분하다.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돈,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경제 구조를 모색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무난한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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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성장 시대가 온다

The End of Growth
성장의 종말과 세계 경제의 미래

 

리처드 하인버그 지음
노승영 옮김
부키 펴냄

 

독서를 통해 2000년 닷컴 버블과 2008년 금융위기가 개별 사건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사건이었음을 알게 됐다. 닷컴 버블을 수습하기 위해 공급한 유동성이 부동산 버블을 키웠고 그것이 금융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은 금융위기의 전말이 드러난 2011년에 출간됐다.

이 책의 원서는 미국에서 2011년 9월에 출간되었고, 2012년 6월에 증보면이 전자책 형태로 출간되었다. 부키에서는 초판본에 증보면을 추가한 형태로 국내에 번역 출간하였다.

 

지금의 통화·금융 시스템에서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말은 은행이 돈을 더 많이 빌려준다는 말이다. 이렇게 공급된 유동성이, 달리 말해 부채가, 실물 경제로 뒷받침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커졌다. 한계가 임박했다.

부채는 결코 완전히 상환할 수 없다. 부채가 청구하는 양만큼의 노동과 자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유, 물, 인(비료의 원료), 생선(수산 자원) 등 모든 자원이 한계에 도달했다. 자원의 생산량이 이제는 감소만 앞두고 있다. 지금이 정점이다. 자원과 더불어 자연도 한계에 다다랐다. 기후변화와 대규모 환경 재앙으로 인한 피해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만물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
딥워터호라이즌의 원유 유출 사고... 파키스탄 홍수... 러시아 자연 발화 화재... 2010년에 자연재해와 환경오염 사고로 인한 GDP 손실 총액은 1500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는다.
2011년 대형 지진과 쓰나미가 일본 북부를 강타했다.
지구라는 유한한 행성에서 무한정 소비를 늘리고 폐기물을 쏟아 낼 수 없다.

 

저자는 직면한 한계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1) 채무를 동반하지 않는 대안화폐의 이용, 2) 성장이 아니라 행복을 측정하는 경제 지표의 도입, 3) 성장 없는 삶을 현실로 인정하는 자세의 변화를 제안한다.

지속 가능성, 즉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일곱 세대 뒤의 후손에게까지 이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경제 성장은 종말을 맞이할까? 그렇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일까? 결코 아니다.

 

책의 90%에 걸쳐 나열된 비관적 현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겨우 10%를 남겨두고 낙관적인 희망을 결론으로 제시한다. 조울증 수준의 변덕이라고 느꼈다. 낙관적인 희망에 공감하기 힘들었지만 비관적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번역은 나쁘지 않았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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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가 찾은 경제 위기 돌파 전략

위험한 일본 경제의 미래

 

데이비드 앳킨슨 지음
임해성 옮김
더난 펴냄

 

2020년 출간된 책이다. 저자는 17세부터 30여년간 일본에 정착해서 생활한 영국인이다. 그가 해외 경제학자들 118명의 논문을 분석해서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한다.

경제 성장의 구성요소는 인구 증가와 생산성 향상이다. 인구가 증가하거나 생산성이 높아지면 경제가 성장한다. 인구 감소 문제를 겪고 있는 선진국은 일본과 한국이 유일하다. 다른 선진국들도 저출산 문제를 겪고 있지만 그들의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인구가 감소하더라도 경제는 성장해야 한다. 고령화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국가가 늘어나는 노년층을 보살필 수 없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문제를 동시에 겪고 있는 일본이 경제 성장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성을 높이는 것뿐이다. 저자는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최저임금 인상"을 제안한다.

노동자들의 급여가 올라가지 않으면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일본 노동자의 질은 매우 우수하지만 (세계 4위), 일본의 생산성은 매우 낮다 (세계 28위). 생산성이 낮은 책임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영자에게 있다. "생산성이 낮다"는 평가의 이유가 낮은 임금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영자들은 잃어버린 30년 동안 인건비 절감에만 주력했다. 우수한 노동력을 기반으로 별다른 고민 없이 쉬운 전략 (원가절감 박리다매 전략)을 선택했다.

경영자들은 그동안 꾸준히 비정규직과 여성의 비율을 늘려 인건비에 따른 비용을 줄였다... 경영자에게는 가장 편한 전략일지 모르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국익에 반한다.

 

최저임금은 국가 주도로 꾸준히 높여가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은 국가가 경영자들에게 생산성 향상을 강제하는 방법이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의 사례 연구에 의하면 최저임금을 인상하더라도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소득격차를 비롯한 많은 사회 문제가 개선됐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는 세계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문제다. 상식을 깨는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최저임금 인상이다.

최상위층의 소득은 급증해도 경제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 반면 최하위층의 소득 감소는 경제에 바로 악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고소득층에 대한 감세 등의 정책보다는 저소득 계층의 소득을 늘리는 정책이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는 우리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임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을 참고하자는 역자의 말에 공감한다.

지구상에서 '인구 감소를 전제로 한 경제 모델'에 대한 경험을 하는 나라가 일본 밖에 없다... 일본은 우리에게 있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좋은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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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 이론의 일인자가 말하는

시간 여행과 상대성 이론

 

편집부 지음
강금희 옮김
뉴턴코리아 펴냄

 

글보다 그림이 좋은 책이다. 책의 내용을 전부 이해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재미 삼아 잡지를 뒤적거리는 느낌으로 독서했다. 편집부에서 만든 책답게 넓고 얕게 다룬다. 장점이다.

뉴턴의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공간, 루프 양자 중력 이론 (loop quantum gravity theory)의 시공간 개념을 소개한다. 한마디로 "물리학은 아직 시간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시간은 일상 생활에서나 과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다양한 접근이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그 답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직전 독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자 '카를로 로벨리'와 '양자 중력 이론'이 언급될 때마다 반가웠다. 무난한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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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과학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터미네이터는 정말 1984년으로 갈 수 있을까?

 

김필영 지음
들녘 펴냄

 

유튜브에서 '5분 뚝딱 철학'이라는 채널을 좋게 봤다. 철학을 짤막하게 요약해주는 채널이다. 그 채널의 주인장이 이 책의 저자다. 머릿말에서 저자가 자기 소개를 한다. 저자는 50이 넘은 샐러리맨이라고 한다. 일하면서 짬짬이 철학을 공부했고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한 이유는 그냥 재밌어서였다고 한다. 같은 샐러리맨으로서 현업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존경스럽다.

책을 고른 이유는 목차에 직전 독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얼핏 봤던 '현재주의'와 '영원주의'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였다. 현재주의, 영원주의, 블록우주 (Block Universe) 개념을 알게 돼서 만족스럽다.

현재주의(Presentism).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이론.
영원주의(Eternalism). 과거와 미래도 현재와 같이 존재한다는 이론.
영원주의의 이미지는 과거/현재/미래가 벽돌을 쌓아놓은 모양이다. 그래서 영원주의를 블록우주(Block Universe) 이론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내가 듣고 싶던 얘기와 저자가 하고 싶던 얘기가 달랐다. 나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과학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저자는 논리학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시간에 관한 저자 나름의 사고실험을 길게 펼치는데 따라가기 힘들었다. 억지스럽다고 느꼈다. 만약 기회가 있어 솔직한 느낌을 얘기한다면 저자는 빙긋 웃으며 대꾸할 것이다.

그럴 수 있죠.

그럴 수도 있다. 어긋나는 만남도 있을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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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der of Time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

 

저자는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다. 중력장을 연구한다. 저자의 연구는 아직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았지만 유력한 이론이라고 한다. 시간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는데, 기존 상식을 버려야 따라갈 수 있다. 사실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도 친숙한 상식을 버려야 이해할 수 있는 설명 아닌가.

시공간이 중력장이고, 중력장이 시공간이다. ...
시간의 양자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을 '양자중력'이라 부르는데, 내 연구 분야다.

 

양자역학 덕분에 과학에 관찰자의 관점, 다시 말해 '주관'이 도입된 것 같다. 책은 텅빈 시간과 공간이라는 무대 안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또는 사물과 사물, 정확히는 사건과 사건)이 서로 얽혀 시공간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묘하고 낯설었다.

시간은 더 이상 일관성 있는 하나의 캔버스가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이 된다.

 

이번 독서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엔트로피의 뜻을 알게 됐다. 항상 헛갈렸던 "엔트로피가 낮다, 높다"는 말의 뜻을 반복학습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됐다 (엔트로피는 무질서도를 뜻한다. 그래서 엔트로피가 낮다는 말은 질서정연하다는 뜻이고, 엔트로피가 높다는 말은 무질서하다는 뜻이다).

아주 먼 과거 세상의 엔트로피는 우리에게 매우 낮게 나타난다.

 

저자의 정체성은 물리학보다 문학 쪽에 있는 것 같다. "세상을 규정하는 물리법칙" 같은 표현 대신 "세상을 읽는 문법"이라는 표현을 쓴다. 챕터마다 인용하는 문구들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식견이 엿보인다. 게다가 서양인임에도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다. 양자 사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는 설명에서 얼핏 작은 꽃들의 얽히고설킨 인연이 화엄세상을 만든다는 불교 교리가 떠올랐는데 역시나 책의 말미에서 작정하고 불교 경전을 인용한다.

기원후 1세기에 제작된 팔리어 불교 경서인 《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는 밀린다 왕의 질문에 답할 때 실체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

 

작고 예쁜 하드커버 양장본이다. 그림이 많다. 전자책보다 종이책이 좋다. 무난한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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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본을 찾아서 2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 강인황, 허형주, 이정 옮김
이산 펴냄

 

1880년대 메이지 유신 때부터 2000년까지의 일본 역사를 설명한다. 서양의 힘에 굴복해 강제로 개항했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절치부심 힘을 기른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세계열강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권력 구조는 급조되어 미숙했다. 군부를 통제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했다. 결국 군부가 국가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잇달아 벌인 탓에 일본은 패망했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일본 역사는 우리 역사와 많이 얽혀있다. 일본 역사를 보는 것은 우리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일본 군부가 극성이던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국민에겐 정치권력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일본 국민의 정치적 무기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 국민에겐 정권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일본의 실패를 거울삼아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하면 좋겠다.

1955년... 보수적인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당해서 자유민주당(자민당)을 결성했다. 이후 자민당은 40년 동안이나 정권을 유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치구조를 흔히 '1955년 체제'라고 부른다.

 

저자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이다. 이 책은 저자의 유작이다. 저자는 책이 출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새는 죽음 직전의 울음이 구슬프고, 사람은 죽음 직전의 말이 선하다고 한다. 이 책의 글도 선하다. 인류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일본의 역사를 치우침 없이 서술한다.

훌륭한 번역이었다 (번역 별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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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요시미 슌야 지음
서의동 옮김
AK 펴냄

 

세상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불구경은 그렇게 재밌지 않았다.

 

헤이세이平成는 1989년부터 2019년까지 30년간 일본이 쓰던 연호다 (지금은 레이와令和를 쓴다). 이 시기 일본은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경제가 망했고, 정치가 망했고, 사회가 망했다. 그런데 일본이 겪은 실패의 목록이 낯설지 않다.

헤이세이 30년간... 위기는 심화했다... 비정규고용 확대와 고용불안, 고학력층의 취직난, 워킹푸어 등의 문제가 분출했고... 초고령화 사회의 도래... 저출산... 세대 간 이해대립이 격화됐다.

비정규직, 고용불안, 청년취업, 워킹푸어, 저출산, 세대갈등... 바로 우리 문제다. 1989년 일본에는 "1.57 쇼크"라는 말이 회자됐다. 출산율이 1.57까지 떨어져 미래에 일본이 지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쇼크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0에도 못 미친다. 어쩌면 우리는 일본보다 더 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의 일본은 한때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앞질렀던 압도적인 경제 대국이었다. 그랬던 일본이 30년째 제자리인 이유는 1980년대의 압도적인 성공에 취해 위기를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날아오는 펀치를 피할 수 없다. 맞더라도 두 눈 뜨고 맞아야 한다. 성공하고 있을 때, 자신감이 넘칠 때 조심해야 한다.

세계사가 대전환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이다.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에서 플라자 합의에 이르는 과정... 일본은 1970년, 80년대를 '풍족한 소비사회' 시대로 구가했기 때문에 동시대에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에 둔감했다.
결국, 헤이세이 일본 사회가 향한 것은 비정규고용의 청년과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사회 전체가 착취하는 체제의 고착화였다. 이를 정당화한 것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고, 여기에 동원된 것이 '구조개혁'이라는 캐치플레이즈였다.

 

일본의 지난 30년은 우리가 참고할 아주 좋은 선례다. 우리가 눈앞에 닥친 위기를 일본보다는 덜 아프게 헤쳐나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쁘지 않은 번역이었다 (번역 별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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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저자 유홍준 선생님이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인생을 들려준다. 어눌한 듯 할 말 다하는 저자 특유의 구수한 문장이 좋았다. 저자는 오랫동안 추사를 연구해 왔고 이미 한차례 추사 연구서도 저술한 바 있는 추사 전문가다.

추사의 작품이 많이 실려 있다. 글과 그림을 보는 안목이 없고 한자 까막눈인 내가 봐도 뭔가 멋졌다. 작품마다 어떤 점을 눈여겨 봐야 하는지 설명이 달려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편집도 좋고 종이도 좋아서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저자의 안내로 추사를 따라 태어나서 살고 죽은 느낌이다. 추사는 명문가에서 부족함 없이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노년에 2차례 긴 귀양살이를 하며 고초를 겪었다. 그의 빛나는 작품은 그런 고단한 노년에 무르익었다. 누구나 삶을 살지만, 그 속에서 인격을 완성시켜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예술이다. 추사는 글,그림의 예술가가 아니라 삶의 예술가였다. 존경스럽다.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칠십 평생에 나는 벼루 열 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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